김만중의 <구운몽> 다이제스트

1. 저자 소개(김만중: 1637 ~ 1692)

조선 후기 문신이며 소설가. 호는 서포. 어머니를 극진히 사모한 효자.

국치를 견디지 못하고 자결한 아버지와 헌신적인 교육자 어머니

  조선 숙종 때 사람인 김만중은 유배지에서 우리의 고전문학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김만중의 호는 서포(西浦)다. 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 서인과 남인의 당쟁이 심했던 시기에 살았다. 그는 명문의 후예로, 증조 할아버지는 거유(巨儒) 김장생(金長生)이고, 아버지는 병자호란 때 조국이 청나라와의 화친을 하는 굴욕을 참을 수 없다고 하여 충절을 지키고자 강화도에서 자결한 충렬공 김익겸(金益兼)이다.

  이런 이유로 김만중은 유복자로 태어나 태생부터 역사의 비극을 한 몸에 짊어졌다. 또한 아버지가 자결한 훨씬 이후에 얻은 경사이지만, 형인 김만기(金萬基)의 딸이 숙종의 첫 번째 비(妃)인 인경왕후(仁敬王后)가 된다.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인 김만기로 인해, 김만중의 일가는 왕실의 외가로 자리잡는다. 아버지쪽의 혈통이 명문으로 이어짐에도 불구하고, 김만중이 유복자가 되는 불행을 겪음은 청나라에 굴욕을 맛보아야 했던 조국의 암울한 시대에서 비롯된다. 이후에도 반복되는 김만중의 시대적 불행은 당쟁으로 인해 얼룩지다가 말년에는 유배지에서 삶을 마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복자인 김만중이 당쟁이 치열하던 시기에 젊어서 정계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윤씨의 헌신적인 교육과 많은 노고 때문이었다.

  김만중의 어머니인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尹斗壽)의 후손으로 이조참판 윤지(尹墀)의 딸이며, 할머니는 선조의 따님인 정혜옹주(貞惠翁主)다. 김만중은 아버지 쪽과 어머니 쪽 양쪽 모두의 명문 혈통을 이어받았다. 아버지가 국치(國恥) 한을 품고 자결했을 때 어머니에게는 5살인 장남 김만기와 뱃속의 김만중에 대한 양육의 책임이 떠맡겨졌다. 가난한 상황에서도 해평 윤씨는 두 아들이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엄하게 교육을 시키는 한편, 자애로운 현모였다. 어머니와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다해야 했던 해평 윤씨는 바느질품과 베틀질 끼니를 때우면서도 아들들이 읽을 책을 구하는 데는 아낌이 없었다. 좋은 책이 나왔으면 책값에 상관없이 손수 구해오거나 구하기 힘든 책은 홍문관의 서리에게 빌려와 손수 베껴서 자식들을 교육했다. 또한 가난한 처지에 스승을 모실 만한 형편이 못되자, 본인 스스로가 『소학(小學)』, 『사략(史略)』, 『당시(唐詩)』 등을 직접 가르쳤다. 이처럼 해평 윤씨는 어머니이자 스승으로써 김만기․김만중 형제의 사상과 정신을 이끌어왔다.

당쟁으로 일그러진 혼란한 정치 상황과 개인의 비극적인 삶

  김만중의 본관은 광산이고, 아명은 선생(船生), 자는 중숙(重淑), 호는 서포(西浦),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서포는 1637년(인조 15년)에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로부터 엄한 교육을 받았다. 16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29세에 정시 갑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벼슬생활을 시작한다.

  강직한 성격 때문에 인해 여러 차례 유배생활을 한다. 그는 32세 때에 현종에게 미움을 받아 파직당하고 유배의 길에 오른다. 그 후에 다시 벼슬직을 역임하다가, 37세에 예송논쟁에 휘말려 유배를 갔다가 다시 벼슬길에 오른다. 그리고 숙종 9년의 해였던 47세 이후 두 번의 대제학에 오르는 영광을 누린다. 51세에 희빈 장씨의 일을 직언하다가 숙종의 미움을 받아 파직 당하여 유배길에 올랐다. 후에 숙종은 80세의 노모인 어머니가 애통해함을 이유로 잠시 서포를 석방했다가 다시 희빈 장씨를 논해서 또 귀양을 간다. 서포는 결국 유배지에서 모친상 소식을 접하고 숙종 18년 56세에 영원히 세상을 떠났다.

  이와 같이 서포가 벼슬길과 유배생활을 반복한 까닭은 강직한 성격 탓도 있지만, 당쟁이 치열하던 시대 탓도 무시할 수 없다. 효종 때부터 숙종 때까지는 서인과 남인 사이의 당쟁이 치열하던 시기였다. 더욱이 숙종 때는 장희빈 일가를 비롯한 남인이 득세하고 서인의 거두들이 거세당했다. 서포는 서인으로 장희빈과 결탁한 이들의 파격적인 승급을 거론하다가 숙종의 미움을 받아 유배생활을 반복하다가 귀양에서 풀려나지 못한 채 그토록 사모하던 어머니의 임종도 못 본 한을 품고 죽음을 맞았다.

  서포는 국치와 당쟁이 자신에게 미친 비극을 작품에 잘 형상화했다. 그는 정치적 상황을 우회적으로 풍자하기도 하고, 유교적 이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불교적 깨달음을 전하고자 했다. 서포는 숙종과 인현왕후, 장희빈을 풍자한 『사씨남정기』를 지어서, 미색을 탐하다가 정사를 그르치는 임금에 대한 경계를 후세에 남겼다. 그리고 『구운몽』을 지어서 유교적인 출세욕과 정욕을 탐함에 대한 허망함과 세월의 덧없음을 불교적 깨달음을 통해 전달했다.

  서포는 자신의 비극적 삶과 그로 인한 어머니의 근심을 위로하기 위해 『구운몽』을 창작했다. 속설에 의하면, 『구운몽』은 유배당한 자식을 근심하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하룻밤에 지었다고 한다. 김만중이 쓴 『서포집』여기저기에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어머니에 대한 극진한 효심은 유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미색으로 인해 정사를 그르치는 왕에 대한 풍자로 시대적 혼란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동시에, 정욕으로 일그러진 유교적 출세주의를 비판했다. 그리고 서포 스스로 그러한 것들에 의해 반복되는 좌절을 경험하면서 세상의 욕심을 초월하여 더 큰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했다. 서포의 효행은 죽은 뒤에도 인정받아 1698년 관직이 복귀되고, 1706년 효행에 대한 정표가 내려졌다.


2. 대충 훑어보기

  육관대사의 제자인 성진은 동해용왕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라는 스승의 심부름을 하러 동해바다의 용궁에 간다. 성진은 동해용왕이 권하는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물가에서 있는 팔선녀와 서로 수작을 하고 헤어진다. 성진이 선방에 돌아와 팔선녀를 생각하며 불가의 세계를 후회하고 유가적인 입신양명과 부귀영화를 원한다. 육관대사가 성진을 불러 죄를 묻고, 그 업보로 성진과 팔선녀를 인간세상에 내친다. 인간세상에서 소유로 태어난 성진은 전생의 기억을 잊어버리고 과거에 급제하고, 전쟁에 팔선녀였던 낭자들을 만난다. 소유는 그 중 난양공주와 영양공주를 정실로, 여섯 낭자를 첩으로 맞이해서 인간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누린다. 나이가 들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부귀영화를 누려본 소유는 인생이 허망해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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